SK텔레콤은 유심(USIM) 해킹 사태 이후 “최대 7조 원의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위약금을 면제할 경우 최대 500만 명의 고객이 통신사를 떠날 수 있으며, 그들의 3년치 통신요금과 위약금 손실을 합산하면 7조 원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세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위약금을 면제하면 500만 명이라는 대규모 고객 이탈이 현실화된다는 것. 둘째, 고객 이탈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는 고스란히 기업의 피해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 셋째, 이런 손실은 위약금 면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가운데 셋째, 즉 “이 모든 손실은 위약금 면제 때문”이라는 전제는 특히 문제가 크다. 가정이 맞다고 치자. 정말로 500만 명이 이탈해 3년간 7조 원의 손실이 난다 해도, 그 원인이 위약금 면제 때문일까? 아니면 회사가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냉정히 말하자. 만약 500만 명 이상의 고객이 떠났다면 그 이유는 해킹 사고에 대응하는 SK텔레콤의 무책임한 대응 때문일 것이다. 고객은 해킹 피해로 불안을 느꼈고, 그에 대한 보상은커녕 명확한 기준도, 실질적 조치도 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 통신사를 바꾸기로 결정한 것이다. 위약금이 있든 없든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기업의 대응 실패다.
결국 7조 원 손실은 위약금 면제 때문이 아니라, 신뢰 상실의 결과다. 신뢰가 있었다면 고객은 남았을 것이고, 위약금이 없어도 이탈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SK텔레콤이 해야 할 일은 복잡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고객 신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통신시장은 사실상 3개사가 과점하고 있다. SKT, KT, LGU+가 사실상 전국 통신망을 나눠 갖고 있고, 고객 대부분은 이 세 기업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SK텔레콤의 7조 원 손실은 그 자체로 사회 전체의 손실이 아니라, 경쟁사의 매출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즉, SKT의 손실이 ‘시장 붕괴’나 ‘통신 인프라 위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통신사 간 경쟁이 제 기능을 하도록 만들고, 신뢰를 저버린 사업자는 시장에서 퇴출 압력을 받도록 유도하는 것이 건강한 생태계다. 그걸 막기 위해 위약금이라는 족쇄를 계속 씌우겠다는 발상은 소비자의 권리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일이다.
기업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지금 SK텔레콤은 자신이 만든 위기를 고객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다. 손해를 줄이고 싶다면, 먼저 고객의 신뢰부터 회복하라. 그래야 7조 손해도, 고객 이탈도 막을 수 있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진심 어린 책임감과 변화의 의지다.